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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안아줍시다
  • 설교일2021-11-14
  • 성경본문누가복음 15:20~24
  • 설교자이하준목사
  • 조회수57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 안아줌

여러분도 운전을 하다가 교통사고 한번쯤은 당해본 적이 있을 겁니다. 그런데 요즘은 교통사고가 나면 현장을 목격한 증인이 없어도 비교적 과실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바로 블랙박스라고 부르는 장치 때문이지요. 자, 여기 블랙박스에 찍힌 교통사고 현장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 보여주면서)여러분 이게 무슨 장면 같습니까? 블랙박스 영상인데 뭔가 이상하죠? 추돌사고가 난 차 두 대가 서 있는데 그 앞에서 어떤 아주머니가 젊은 여자 분을 꼭 끌어안아 주고 있습니다. 엄마와 딸일까요?

잠시 짧은 영상을 하나 보겠습니다. 이 영상에는 사고현장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분명하게 찍혔어요(영상 https://youtu.be/T3NbIXfHCQ8). 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시겠지요? 한 젊은 엄마가 새벽에 고열로 아픈 아이를 데리고 급히 병원 응급실로 달려가다가 당황해 앞차를 추돌한 겁니다. 그런데 차에서 내려 사과하며 울먹이는 아이 엄마에게 상대 차주인 중년의 아주머니는 놀라운 반응을 보입니다. 아이엄마를 꼭 안아준 겁니다. 자기도 사고를 당해 황당하지만 사연을 듣고 보니 딱한 거에요. 게다가 아이 엄마가 자기 딸과 나이가 같다는 얘기를 듣고 힘내라고, 나는 괜찮으니 사고처리는 나중에 하고 빨리 아이를 병원에 데려가라고 격려하며 꼭 안아준 거지요.

여러분, 지금 세상이 얼마나 험합니까? 세상이 너무 차갑고 각박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한 번씩 들려오는 훈훈한 이야기가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해줍니다. 좀 무서운 사건, 살벌한 얘기, 각박한 이야기 말고 이런 따뜻한 이야기가 뉴스에 매일 나오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이 안아줌에 대해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안아줌” 참 좋은 말입니다. 이 중년의 아주머니가 딱한 사연을 듣고 백 마디 말보다 꼭 안아준 게 얼마나 소중하고 따뜻합니까? “힘내라, 우리 딸하고 나이도 같은데 젊은 나이에 어린 아이 키우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냐? 애들 키우는 게 다 그런 거다. 잘 키워라..” 등등 수많은 말을 해주는 것보다 그저 꼭 안아준 이분의 행동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렇습니다. 안아줌의 힘이 이렇게 큽니다. 저는 이 영상을 보고 곧바로 성경에도 안아줌이 나오는지 찾아봤어요. 안아준다는 말이 성경이 많이 나오는데 정말 이게 소중한 주제더군요.

 

❚ 아버지의 안아줌, 하나님의 안아줌

그럼 제일 먼저 성경에 나오는 안아줌 가운데 가장 소중하고 대표적인 암아줌이 뭘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주심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에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비유지요. 그런데 이 비유 중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20~24절 말씀은 어떤 장면이냐? 바로 탕자가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탕자(잃어버린 아들), 아직 멀쩡하게 살아있는 아버지에게 유산 미리 내놓으라고 겁박해서 그 돈 가지고 먼 나라에 가 허랑방탕 낭비해버린 이 둘째 아들, 돈 다 쓰고 거지꼴 된 탕자는 할 수 없이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부정하다고 먹지도 키우지도 않는 돼지치기가 되어 돼지가 먹는 쥐엄나무 열매라도 얻어먹으려 하는데 그마저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너무 비참한 지경이 된 거지요.

할 수 없이 그는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굶어죽느니 차라리 아버지 집에 가서 용서를 구하고 그 집 종노릇이라도 하자.” 결심을 합니다. 그래서 완전 거지꼴로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오던 아들이 누굴 만난 겁니까? 바로 동구 밖에서 이제나 저제나 돌아올 아들을 매일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자기 아버지를 만난 겁니다. 20절 읽지요.

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저 멀리 아들 모습이 ‘희미하게’ 보이자 목 빠지게 기다리던 아버지는 한걸음에 아들에게로 달려가 어떻게 합니까?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춥니다. 왜 그랬을까요? 탕자잖아요? 이미 잃은 아들, 버린 자식입니다. 너무 괘씸해서 호적에서 파버려도 시원치 않을 놈인데 도대체 아버지는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아들이니까요. 아버지니까요.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내 아들이니까, 아무리 막돼먹은 놈이라도 내 아들이고, 아무리 괘씸해도 내 아들이니까, 그리고 내가 걔 아버지니까요. 여러분! 이게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여기서 아버지가 누구겠습니까? 우리의 하늘 아버지, 하나님이십니다. 이 탕자는 누구겠습니까? 우리입니다. 물론 원래 본문에서는 세리와 죄인들을 뜻하지만, 사실은 오늘 우리 자신을 가리키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 아버지는 이 죄인을,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요 내쳐버려야 할 못난 자식을 용서하고 꼭 안아준 겁니다. 그리고 종들에게 즉시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고 명합니다. 살진 송아지 잡아서 잔치를 벌이자고 합니다. 다시 아들의 지위를 회복시켜 준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아들,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을 기쁘게 맞이하자는 겁니다.

그런데 이 모든 과정에서 저는 딱 이 한 마디, “목을 안고”라는 구절이 제일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들은, 탕자는 아버지에게 미안한 마음, 죄책감 때문에 이런저런 소리 많이 합니다. 뭐 “나는 아버지 아들 자격도 없고요, 그냥 품꾼으로 종으로 여겨주세요.” 이런 소리를 하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들 말 듣고 무슨 대답을 합니까? 한 마디도 안 해요. “무슨 낯짝으로...” 소리도 안 하고 “잘 왔다, 너 생각 잘 한 거야, 난 널 이미 용서했어.” 뭐 이런 얘기도 안 합니다. 그냥 돌아온 아들을 꼭 안아줘요.

여러분!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무슨 구구절절 많은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말없이 꼭 안아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미 아들은 후회하고 있잖아요? 이미 회개하고 돌아왔잖아요? 그런데 무슨 말이 필요하겠어요? 그냥 말없이 꼭 안아주는 것, 그 행동 하나 안에 아들을 향한 용서와 사랑과 위로가 다 들어있는 겁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안아줌의 힘입니다. 백 마디 말, 천 마디 말보다 강하고 수많은 메시지를 담은 행동이 바로 안아줌입니다. 출근길에 멀쩡한 내 차를 뒤에서 박은 젊은 엄마, 아픈 애 때문에 마음은 타들어가지, 사고는 내서 미안하지,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 울먹이는 그 아이 엄마를 그냥 꼭 안아주잖아요? 그 안아줌 속에 “괜찮다”는 용서도 들어있고, “힘내라”는 위로와 사랑도 들어있고, 그래서 사람들이 이 각박한 세상에서 그 블랙박스 한 장면만 보고도 마음이 훈훈해지고 눈물이 핑 도는 거 아니겠어요?

그렇습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도 이렇게 우리를 안아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 아버지 앞에 감히 얼굴도 못 드는 부끄럽고 천한 우리를 그저 아무 말 없이 꼭 안아주셨어요.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습니까? 그냥 꼭 안아주셔서 우리를 향한 용서와 사랑과 위로를 다 보여주신 겁니다. 하나님은 이런 말씀을 하고 싶으셨겠죠.

사랑하는 아들아, 사랑하는 딸아, 넌 누가 뭐래도 내 아들이요 딸이고 난 네 아버지란다. 그러니 걱정 말아라. 미안해하지도 말아라. 나는 이미 너를 용서했단다. 힘내라!

그런데 이 긴~말이 그냥 이 안아주시는 행동 하나에 다 들어가 있는 거에요.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줌이 정말 귀하고 소중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이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줌을 다 경험한 줄로 믿습니다!

 

❚ 우리의 안아줌

자, 그렇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이 안아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나를 꼭 안아주신 그 안아줌을 체험한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요즘 새벽에 큐티 본문으로 욥기를 읽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기에서 욥을 위로한답시고 찾아온 세 친구, 엘리바스 빌닷 소발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욥은 너무 힘들었어요. 재산도, 자식도, 가족도, 건강도 다 잃고 정말 인생의 모든 것을 잃고 깊은 좌절에 빠진 욥은 그저 친구들의 위로가 필요했어요. 친구들의 안아줌이 필요했던 거에요. 이럴 때 친구들은 긴 말 하면 안 돼요. 사실 이런 상황이 되면 할 말도 없거든요? 저도 목사지만 너무 황당한 고통을 당하는 성도들을 만나면 할 말을 잃어요. 할 말이 없어요. 여러분, 그럴 때 제가 어떻게 하면 그분들께 제일 좋은 위로가 될까요?

세 친구는 그저 아프고 힘든 욥을 꼭 안아주면 되는 거였어요. 한 마디도 하지 말고 그저 친구의 손 꼭 잡아주고, 꼭 안아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친구들은 그 안아줌 대신 분석하고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도대체 너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일이 생긴 거야?” 원인 분석하고 판단하고 정죄까지 해요. 마치 탕자의 비유에서 동생을 위해 벌어진 잔치를 보며 분노하고 ‘내 동생’ 아니라고 내치는 맏아들처럼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아픈 사람인데, 힘든 사람인데, 원인 분석하고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꼭 안아줘야 하는데 밀어내고 내치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세상이야 각박해서 그렇다 치고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나는 이미 하나님 아버지의 안아줌을 체험했는데, 하나님이 나를 분석하셨나요? 네 죄를 알렸다, 따지시던가요? 하나님 아버지가 나를 정죄하시던가요? 아니요! 아버지니까 그냥 아무 말 없이 안아주셨잖아요? 그런데 이런 사랑과 용서와 위로의 안아줌을 체험한 사람이 남한테는, 그것도 아픈 사람인데, 너무 지치고 힘든 사람인데 거기에 대고 안아주기는커녕 판단하고 분석하고 정죄를 한다? 그건 아니지요. 여러분! 이 시간 우리를 한번만 돌아봅시다. 나는 블랙박스 영상 속에 나온 아주머니처럼, 그리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처럼 안아주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판단하는 사람, 정죄하는 사람, 내치는 사람입니까?

우리는 지금 언택트(untact), 비대면 비접촉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코로나 전에 한동안 허그(hug) 운동이 벌어졌지요. 그냥 길 지나가는 모르는 사람 꼭 안아주는 겁니다. 그런데 이젠 그러면 큰일 납니다. 감염법 위반으로 잡혀갑니다. 그런데 이런 비대면 비접촉 시대가 길어지다 보니 우리들 사이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습니다. 암아줌도 스킨십도 다 사라지고, 몸도 마음도 멀어져만 갑니다. 그러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1970년대 루마니아의 악명 높은 독재자 차우셰스쿠는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무조건 피임과 낙태를 금지하고 이 법을 어기면 가차 없이 처벌했습니다. 가정 당 의무적으로 아이를 넷 이상 낳으라고 법을 만들고 감시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수많은 빈곤 가정이 아이를 많이 낳아 책임을 못 지고 고아원에 맡기게 된 겁니다. 당시 루마니아 탁아시설과 고아원은 아기를 보살필 직원이 너무 적어서 그저 아기침대에 우유병만 매달아두는 수준밖에 안 됐고, 안아주고 사랑해주는 애정의 보살핌은 불가능했습니다. 그랬더니 아기들 중 상당수가 심각한 발육장애나 정서장애가 나타난 겁니다. 실제로 아기를 자주 안아주고 스킨십을 해주지 않으면 뇌 발달 과정에 문제가 생겨 IQ가 낮아지거나 체구가 작아질 수 있고, 만성적인 정서장애가 나타난다고 합니다. 아이의 양육이 단순히 음식의 배급만이 아니라 신체적 접촉, 따뜻하게 안아주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해 주며 사랑스럽게 눈을 맞추어야 제대로 자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제가 “오늘 안아줌에 대한 설교를 들었으니 설교 후 나가면서 만나는 사람 꼭 안아주세요.” 하면 질겁하는 분도 있겠지요. “징그럽다.” 혹은 “요즘 어느 시대인데 저런 소리를?” 할지 몰라요. 하지만 그래도 난 괜찮다 하는 분은 나가다가 만난 분을 꼭 안아 주세요. 문제 생기면 제가 책임질께요. 교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남편, 아내, 자녀 안아본 게 언제인지?), 세상에 나가서도 정말 힘들고 지친 분 있다면 말없이, 무슨 구구절절 긴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그저 말없이 꼭 안아 주세요. 그게 백 마디 천 마디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저도 아플 때 제 마음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분 한 분만 만나도 너무 힘이 나더군요. 힘들 때 저한테 수많은 많은 말을 해주는 사람보다 그저 손 꼭 잡아주는 사람, 안아주는 사람, 특히 같이 눈물 흘려주는 분 한 분만 계셔도 그렇게 용기가 나더군요. 저는 아픈 과정 겪으며 잘나고 똑똑한 목사보다 힘든 성도들을 꼭 안아주는 목사가 되어야겠다 결심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아프고 힘든 분들 꼭 안아주는 사람 되시고, 우리 교회도 안아주는 교회가 꼭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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