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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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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닥쳐올 때 (2) : "관용으로!"
  • 설교일2020-05-31
  • 성경본문빌립보서 4:4~7
  • 설교자이하준목사
  • 조회수61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 배타와 관용

역사(歷史)를 살펴보면 참 많은 교훈을 얻게 됩니다. 역사라는 게 결국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 아닙니까? “사람들이 옛날에 이런 일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행동했다.”는 걸 기록한 게 역사 아닙니까? 그러니까 역사를 들여다보면 과거를 공부하는 것으로만 끝나는 게 아니라 현재의 우리가, 그리고 미래의 우리가 같은 상황이 닥쳐올 때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배우게 되는 거지요. 결국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과거를 위한 게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위한 것입니다. 임진왜란과 이순신장군의 역사를 공부하면 나라가 평안할 때 위기상황을 잘 대비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게 되고, 독일의 히틀러를 보면 한 사람의 지도자가 얼마나 국민 전체를 도탄에 빠뜨리고 세계평화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배우게 되는 거지요. 그래서 저는 역사를 참 좋아합니다.

제가 역사를 공부해보니 인류가 큰 위기를 맞게 되면 어김없이 일어나는 두 가지 현상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두 가지가 뭐냐? 바로 배타(排他)와 관용(寬容)입니다. ‘배타’는 어떻게 일어나냐? ‘편견, 증오, 혐오’로 나타납니다. 로마시대 네로 황제는 정치적 위기를 맞게 되자 로마시내에 불을 지르고 그것이 기독교인들의 소행이라며 기독교인들을 산채로 불 붙여 죽입니다. 중세시대에 페스트(흑사병)가 유행하자 마녀사냥이 시작되지요. 엉뚱한 여성들을 잡아 마녀라고 죄를 뒤집어씌우고 화형 시켜 사람들의 불만과 증오를 그리로 돌리려 합니다.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국민들의 불만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들이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내서 수천 명의 조선인을 학살했습니다. 지금도 이런 역사가 되풀이 되고 있지요. 앞서 언급한 역사적 사건들을 보세요. 요즘 말로 하면 다 ‘가짜뉴스’입니다. 악의적인 의도로 가짜뉴스를 생산해서 엉뚱한 사람에게 죄를 덮어씌우고 편견과 증오를 부추기고 혐오를 일으키는 겁니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하고 사악한지 여실히 드러나는 사건들이지요.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전 세계가 불안에 시달리자 미국이나 유럽 등에서 동양인에 대한 혐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너 때문에 코로나가 일어났다.”고 모욕을 당하거나 폭행당하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나라 사람이 길거리에서 “너 중국인이지?”라는 말을 듣고 폭행당하는 일도 일어나고요. 제가 아는 사람도 유럽에 오래 살았는데 코로나 사태 이후 그 친절하던 이웃들이 슬슬 피하고 냉대하는 일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요즘 가짜뉴스는 또 얼마나 많습니까? 눈만 뜨면 근거 없는 가짜뉴스가 난무하며 안 그래도 불안한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런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는 건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적 위기가 닥쳐올 때 배타와 편견과 혐오만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드물긴 하지만 관용으로 위기를 극복해가는 사람들도 있다는 겁니다. 코로나 사태 초기인 지난 1월 31일, 코로나 발원지인 중국 우한에서 교민 367명이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 사람이고 누군가의 가족지만 그 어느 지역도 이들을 수용하는 시설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어요. 당연하지요. 누가 코로나 바이러스를 옮길지도 모르는 사람들을 우리 동네에 수용하려 하겠습니까? 그러자 정부가 아산과 진천 지역 정부시설에 이들을 수용하기로 결정했고, 지역주민 상당수가 극렬하게 반대하며 트랙터로 입구를 막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 때, 지역민들 중심으로, 특히 그 아산시 기독교연합회 등이 주축이 되어 “우리가 아산이다!” 캠페인을 펼치게 되었습니다. 아산시민으로서 자부심을 갖고 이들을 환영하고 속히 격리기간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도록 돕자는 겁니다. 저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이거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인간의 본성으로는 절대 못할 일이거든요. 그런데 사랑으로, 관용으로 그걸 한 겁니다. 이게 바로 위기를 극복하는 힘, 바로 관용(寬容)의 힘입니다.

여러분! 위기가 닥쳐오면 누구나 당황하게 마련입니다. 너무 힘들고 지치고, 내 한 몸 간수하기도, 내 가족만 챙기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지금 남 생각하고 챙기게 생겼습니까? 못 하지요. 아니 안 하지요. 게다가 도대체 왜,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냐 원망과 불평이 터져 나옵니다(중국놈들 때문에?). 그래서 배타와 혐오가 일어나는 겁니다. 누군가에게는 책임을 떠넘기고 원망 불평 쏟아 부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이런 배타와 혐오, 책임전가로는 절대 위기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위기를 더 악화시키고 최악의 상황으로 만들지요. 오직 사랑과 관용만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입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고 우리 기독교인들만이라도 힘들지만, 정말 힘들지만 어려울 때일수록, 요즘 같은 위기상황일수록 더욱 사랑과 관용의 정신을 실천해야 할 줄 믿습니다.


❚ 빌립보교회의 위기와 관용

빌립보교회에도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지난주일에도 말씀드렸지만 교회의 위기라는 게 대부분 사람 사이의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저는 하나님 때문에 교회에 문제 생기는 것 한 번도 본적 없습니다. 물론 재정문제 등 다른 이유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오히려 재정이 부족하면 성도들은 한마음 되어 더 기도하고 헌금합니다. 어떤 다른 위기가 닥쳐와도 성도들은 오히려 더 단합하고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합니다. 그런데 딱 하나, 성도들 마음이 하나 되지 않으면 그 교회는 반드시 문제가 생깁니다.

지난주일 소개한 대로 빌립보교회의 위기는 여성도인 유오디아순두게 두 사람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누구보다 교회 일에 열심인 두 사람, 그래서 제가 이 두 사람을 ‘유권사’ ‘순권사’ 이렇게 불렀더니 우리 교회 유 씨 성을 가진 권사님들, 이름에 순 자가 들어간 권사님들이 깜짝 놀랐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이 ‘유권사’와 ‘순권사’는 본 교회 ‘특정인물’과 전혀 관련이 없으니 아무 걱정 마시기 바랍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 두 사람이 갈등을 일으킨 이유는 성경에 안 나와요. 추측만 가능한데 아마도 너무 열심히 교회 일을 하다 보니 지나친 경쟁심에서 생긴 갈등이 아닐까 싶습니다. 두 사람이 성격이나 스타일이 안 맞았을 수도 있어요. 같이 일하면서 사사건건 부딪히고 마음이 불편했을 겁니다. 문제는 이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이 생각보다 심각해서 전체 교회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는 거에요. 아마 두 사람이 워낙 열심인 사람들이고 또 지도력도 있어서 빌립보교회 여신도들 모두가, 나아가 남편들과 남자들, 전체 교인들까지 두 패로 쫙 갈라져 교회가 심각한 위기를 겪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유오디아(Euodia)라는 이름은 ‘향기(香氣)’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요. 아마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좋은 성도가 되라는 뜻일 텐데 결과적으로 유오디아는 교회일은 열심히 했는데 향기를 풍기는 게 아니라 ‘악취(惡臭)’를 풍기는 사람이 되고 만 겁니다. 또 한 사람, 순두게(Syntyche)는 “행운이 있는”이라는 뜻이에요. 이 사람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행운과 행복’을 끼치라는 뜻일 테지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순두게는 “그대 내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대 내게 불행과 상처를 주는 사람”이 되고 만 겁니다. 사람이 이름값을 정말 잘 하고 살아야 해요.

여러분! 교회 일 열심히 하는 것, 그거 참 귀한 일입니다. 교회에 충성하고 하나님 일을 성심성의껏 하는 사람, 참 귀한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열심히는 하는데 가는 데마다 말을 만들고 일을 만들고 상처와 혼란을 준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누군가 그러더군요. “교회 일 열심히 해서 시끄럽고 문제 만드느니 차라리 열심히 안 하는 게 낫다.” 글쎄요. 꼭 맞는 말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중요한 것은 교회 일, 하나님 일이라는 게 열심히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반드시 그 결과물이 아름다워야 한다. 덕(德)을 꼭 세워야 한다. 모두가 행복하고 기뻐할 일이어야 한다. 이런 뜻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빌립보교회뿐 아니라 고린도교회에도 비슷한 편지를 보낸 적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다른 어느 교회보다 성령 충만하고 은사가 풍성하고 지식도 높고 열심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밥만 먹으면 싸우고 분쟁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렇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덕(德)’을 강조하고 ‘사랑’을 강조한 겁니다. 너 아무리 은사가 풍성하고 교회 일 열정적으로 해도 교회에 덕을 못 세우면 소용이 없고,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입니다.

네, 그렇습니다. 결국 빌립보교회의 대표적인 여성성도 두 사람, 유오디아와 순두게는 교회 일은 열심히 했는지 몰라도 덕을 세우고 사랑을 세우는 데는 실패한 것입니다. 그래서 둘은 성격차이인지 경쟁심인지 몰라도 계속 다투고 싸웠고, 이로 인해 빌립보교회 전체가 심각한 위기를 맞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바로 이런 상황에서 사도 바울은 어떤 해법을 제시할까요? 그 해법이 바로 오늘 설교제목입니다. 뭡니까? 네, 바로 관용(寬容)입니다. 배타의 반대말, 편견 증오 혐오의 반대말, 관용입니다. “서로 너그럽게 대하고 품어주는 것.”입니다. 이 관용이야말로 빌립보교회의 분쟁과 위기뿐 아니라 오늘 우리 모든 교회들, 그리고 우리의 가정과 이 사회 전체에 위기가 닥쳐왔을 때 그것을 함께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비결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인 빌립보서 4:5에서 이렇게 권면한 것이지요.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여기서 ‘관용’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에피에이케스’인데 그 뜻이 “위기를 당해도 쉽게 동요되지 않고 평정을 유지하는 인내”를 뜻합니다. 또한 “자신의 당연한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을 너그럽게 대하는 태도”를 뜻해요. 뜻을 아시겠지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자기 제자였을 유오디아 권사와 순두게 권사에게 “이제 너희 둘은 좀 평정심을 찾고 서로를 품어주고 너그럽게 대해라.” 이렇게 권면한 거에요.

글쎄요. 저는 참 궁금합니다. 유권사와 순권사가 과연 이 사도 바울의 간곡한 권면을 듣고 서로 화해하고 잘 지냈을지, 아니면 계속 경쟁하고 싸우고 자기편 만들고 하다가 교회를 어지럽혔는지 말입니다. 상상은 여러분께 맡기도록 하고요,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우리는 과연 이 말씀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게 성경의 핵심 아니겠어요? 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느냐, 유권사와 순권사가 어떻게 했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말씀 앞에서 어떻게 순종하고 살아가느냐 이게 중요한 겁니다. 아무쪼록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 앞에 순종해 ‘관용’을 실천하고 ‘덕’과 ‘사랑’을 세워가는 ‘좋은 성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억하세요. ‘열심 있는 성도’도 귀하지만 ‘좋은 성도’가 더 귀합니다. 좋은 성도는 덕을 세우고 관용을 실천하는 성도다! 기억하세요.


❚ 관용을 세우는 방법

이제 오늘의 주제인 ‘관용’, 위기의 시대, 요즘처럼 코로나가 닥쳐오고 위기가 닥쳐올 때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관용, 이 관용을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 세 가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

첫째, 참된 관용은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다. 왜냐? 우리 힘으로는, 사람의 본성으로는 그게 안 되기 때문이에요. 빌립보서 4:2 말씀 봅시다.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합니다. 우리가 ‘주님 안’에 있지 않으면 같은 마음은 불가능합니다. 어찌 사람의 마음이 같을 수 있어요? 생긴 것도 다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개성도 강한 우리가 어찌 같은 마음을 품겠습니까? 이혼의 이유 1순위가 ‘성격차이’라지요?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은 절대 사람 성격을 똑같이 만들지 않으셨습니다. 성격이 전혀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전혀 다르고, 가치관도 전혀 다른 두 사람이 만나 평생 서로에게 맞춰가며 살게 하셨습니다. 힘들지요. 참아야 하고 또 참아야 합니다. 이해하고 또 이해해야 합니다. 이런 힘든 과정을 거쳐 비로소 부부가 하나가 되어가는 겁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에요. 전혀 다른 사람이 교회를 다닙니다. 같이 일을 하다보면 성격도 다르고 방법도 달라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가 참고, 저 사람을 품어주고 따라주는 겁니까? 주님 일을 하기 때문이에요. 내 일 하는 거면 그까짓 거 더럽고 치사하면 때려치우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주님 일을 하는 것이기에,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기에 우리는 참아주고 이해해주고 같이 가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관용과 같은 마음을 품는 것은 사람의 본성으로 안 돼요. 오직 주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여러분도 저 사람 품고 이해하기 정말 힘들다면 ‘주님 때문에’ 참고, ‘주님 때문에’ 이해하고, ‘주님을 위해’ 같이 가시길 축복합니다!

둘째, 나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관용할 수 있게 도와야한다.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게만 권면한 게 아니라 3절에 또 다른 인물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여기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너’가 누구인지는 잘 몰라요. “멍에를 같이 한다.”는 말은 부담이나 힘든 일을 같이 한다는 뜻인데 아마도 빌립보교회 성도 중에 사도 바울과 동역하고 늘 바울의 힘든 일이나 부담스러운 일을 기꺼이 함께 도와준 인물이겠지요. 바울은 바로 그 사람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겁니다.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 누구겠어요? 바로 유오디아와 순두게입니다. “그토록 복음사업에 열심이더니 이제는 둘이 분쟁하고 다툰다는데 제가 좀 그 두 사람이 잘 지내도록, 화해하고 관용하도록 옆에서 도와줄래?” 이런 뜻입니다. 또 “글레멘드와 그 외의 나의 동역자들도 네가 좀 도와줘라.” 부탁합니다. 누군지 몰라도 사도 바울이 무척이나 신뢰하고 믿던 사람 같아요. 이런 부탁까지 다 하는 걸 보니 말이에요.

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이 필요해요. 나도 남을 잘 품고 관용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서로 화해하고 잘 지내도록 도와주는 사람, 분쟁과 갈등을 일으키는 장본인이 아니라 분쟁과 갈등이 있는 곳에서 늘 중재하고 화해시키고 화평을 불러일으키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따라 합시다. “나 이런 사람 되고 싶어요!” 꼭 그렇게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니 두 가지 궁금증이 생기네요. 첫째는 “우리 교회의 유권사와 순권사는 누구일까?” 두 번째는 “우리 교회의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 즉 화해와 관용에 본이 되고 남을 돕는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는 여러분 각자 알아서 답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 세 번째, 관용에는 희생과 용기가 필요하다. 관용, 이거 절대 쉬운 게 아닙니다. 내 성질 다 죽여야 하고, 내 생각 주장 다 내려놔야 하고, 내가 손해도 봐야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뭐 하러 이 짓을 해야 하나?” 싶을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관용에는 자기희생과 또 그 희생을 기꺼이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겁니다.

덴마크 국민들이 사랑을 정말 많이 받은 국왕이 있었습니다. 바로 크리스티안 10세입니다. 재임기간 중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점령하는 등 참 많은 위기를 겪은 왕입니다. 그는 1940년 나치 독일이 덴마크를 침공하자 너무도 약한 군사력으로 독일에 대항하다가는 수많은 국민들의 생명이 위태하리라는 판단으로 독일에 국내정치에 대한 독립성을 조건으로 항복했습니다. ‘비겁한 왕’ 소리 들을만한 행동이지요. 그런데 유럽의 대부분 국왕들이 나치 독일 점령기간에 다른 나라로 망명한 데 반해 크리스티안 10세는 나치 점령기간 내내 덴마크에 남아 국민 통합의 상징이 된 용감한 분입니다.

그는 왕궁에 걸린 나치 깃발을 내리게 했는가 하면, 평소에 말을 타고 호위병 하나 없이 코펜하겐 거리를 둘러볼 정도로 백성들을 아끼는 마음이 컸던 왕입니다. 가장 감동적인 사건은 이겁니다. 1941년 나치가 덴마크에 사는 유대인들 가슴에 ‘다윗의 별’이라 불리는 노란 별을 달도록 명령했는데, 이는 유대인들을 쉽게 색출하기 위한 조치였고 유대인이 노란별을 달지 않으면 즉시 총살형에 처해졌습니다. 왕은 깊은 고민에 빠집니다. 당시 다른 유럽 국가처럼 유대인들을 색출해 학살하는 데 협조할 수는 없어요. 그렇다고 군대를 일으켜 나치에 맞서면 많은 덴마크 국민들이 죽을 것이고 가만있으면 수많은 유대인들(그들도 덴마크 국민인데)이 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크리스티안 10세는 호위병도 없이 홀로 말을 타고 거리에 나섰습니다. 그런데 그의 가슴에는 노란별이 달려 있었습니다. “나도 유대인이다!” 덴마크 왕이 스스로 유대인이 된 겁니다. 그러자 덴마크 국민 모두가 국왕을 따라 가슴에 노란별을 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유대인들의 생명을 구하게 되지요. 나치 치하의 국가적 위기에서 덴마크 왕은 마치 예수님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스스로 먼저 가슴에 노란별을 달아서 온 국민의 마음을 모으고 위기를 극복해냈습니다. 그는 이 용감한 결단으로 덴마크 백성들의 생명을 구하고 덴마크에 사는 수많은 유대인들의 생명도 구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관용, 관용의 힘입니다. 우리도 이 관용의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기꺼이 희생합시다. 한없는 관용으로 이 죽을 죄인을 품으신 하나님의 능력이 나와 함께 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힘든 관용을 실천할 용기를 주실 줄 믿읍시다. 그 용기와 관용이 이 어려운 위기 시대, 온갖 편견과 혐오와 배타가 판칠 때 위기를 극복할 힘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 코로나로 큰 위기에 빠진 우리에게 관용의 힘을 허락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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