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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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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를 예배 되게
  • 설교일2020-04-19
  • 성경본문요한복음 4:20-24
  • 설교자이하준목사
  • 조회수361
설교게시판 내용
설교내용
본문내용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22.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 예배를 갈망하라!

미국은 기독교 정신이 뿌리 깊은 나라지요. 그래서 미국에 가보면 여기저기서 성경을 인용한 명칭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보스턴에 있는 세계최고 명문대학 중 하나인 하버드대학 교문에는 십자가와 함께 하버드대학 문장(사진1)이 새겨져있는데 여기에는 라틴어로 VERITAS, 즉 ‘진리’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하버드대학의 설립자가 존 하버드 목사(John Harvard), 이분이 청교도 목사였기 때문입니다.

또 미국에는 유난히 ‘이런’ 이름을 가진 병원이 많습니다. Good Samaritan Hospital, 우리말로 옮기면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지요. 저도 미국에서 이 이름을 가진 병원을 몇 개나 봤습니다만 혹시 여러분, 우리 포항에도 이 이름을 가진 병원이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몇 해 전 재단이 다른 데로 넘어가면서 ‘좋은선린병원’(영어로는 Good Sunlin)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본디 이 병원의 이름은 선린병원(善隣病院), 착할 선(善) 이웃 린(隣), 영어로는 Good Samaritan Hospital이었습니다. 이 병원의 창설자인 고(故) 김종원 장로님(사진2)이 기도하면서 병원 이름을 이렇게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재정난으로 재단이 넘어가면서 이 귀한 성경적 이름을 잃게 되었는데 저는 선린병원 앞을 지날 때마다 너무 안타까운 생각이 들곤 합니다.

그런데 왜 병원 이름을 선린, 혹은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고 짓는지 여러분, 아시지요?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가장 유명한 비유, 바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 그 답이 나옵니다. 강도만나 크게 다친 자를 제사장도 레위인도 피해 가는데 사마리아 사람이 정성껏 치료해준 데서 이 병원 이름이 나온 거지요.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 당시 사람들에게 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이름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그야말로 뒷목잡고 뒤로 자빠질 만큼 충격적인 말이었음을 알고 계신가요? 왜냐하면 사마리아인 자체가 절대 ‘선(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는 남북분열왕국 시대에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였는데, 북 왕국을 멸망시킨 앗수르 사람들이 각지에서 이방인들을 데려와 이 사마리아에 살게 하는 바람에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아들이 많이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르는데 유대인들은 혼혈아 사마리아인들을 멸시 천대해서 사람 취급도 안 했습니다. 심지어 ‘’라고 부르기까지 했지요. 사마리아인들도 물론 하나님을 믿었지만 이렇게 유대인들이 멸시하며,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오는 것도 막고 왕따 시키자, 자기네들끼리 독자적인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성경도 오직 ‘모세오경’만 인정하고, 예배도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에 안 가고 사마리아 옆에 있는 축복의 산인 그리심 산에 제단을 쌓고 자기들끼리 드립니다. 철저히 고립되고 소외된 신앙생활을 한 겁니다.

오늘 본문인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은 사마리아 지역 수가 성 야곱의 우물가라는 곳에서 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십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저 내면 깊이 큰 상처와 갈증이 있었습니다. 남편이 다섯 있었는데 다 죽었는지 이혼을 했는지 전부 헤어지고, 지금 사는 남자도 정식 남편이 아니었어요. 그렇다면 이 여인은 2중, 3중의 상처와 고통을 안고 사는 사람이었던 거지요. 안 그래도 사마리아인이라고 유대인들에게 손가락질 받고 ‘개’ 취급 받고 사는데, 거기다가 당시에 사람 취급 별로 못 받던 여인이에요. 또 거기다가 동족들에게조차 사생활이 몹시 문란한 여인, 속된 말로 ‘화냥년’ 소리를 들으며 산 여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인생 자체가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겠습니까? 얼마나 하루하루의 삶이 애타고 갈급했겠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역으로 이런 사람이, 바로 이런 마음속에 깊은 갈증애타는 심령이 있는 사람이 참된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설교제목이 <예배를 예배 되게>인데 정말 예배다운 예배의 첫 번째 조건이 바로 이 갈증과 애타는 심령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도 아마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수십 년 신앙생활 하며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새벽마다 교회 와서 예배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지고, 간절함도 감격도 없었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서, 혹은 집안에 갑자기 큰 위기나 문제가 생겨서 오랫동안 예배 못 드리다가 오랜만에 예배에 참석하면 얼마나 예배가 소중하게 느껴집니까? 오랜만에 아버지 집에 오면 얼마나 가슴이 메어지고 뜨겁습니까? 습관화 된 신앙생활에는 간절함도 갈증도 없는 것입니다. 오직 내 마음에 애타는 심정이 있고 간절하게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에만 참된 예배가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가 바로 지금 이런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코로나19 사태를 겪으면서 잃은 것이 너무 많지만 얻은 것도 있습니다. 교회를 오고 싶어도 못 오니 그동안 못 느꼈던 교회의 소중함, 예배의 소중함, 그동안 너무나도 당연히 여겨졌던 성도들과 함께 모여 예배하는 것이 절대 당연한 게 아님을 깨닫고, 정말 교회와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까? 바로 이런 갈급한 마음, 애타는 마음이 있는 그 사람이 하나님께 바로 예배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배에 대한 갈망, 예배를 애타게 사모하는 그 사람만이 예배다운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이겁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 하나님께 예배하라!

<예배를 예배 되게>, 참된 예배, 예배다운 예배의 두 번째 조건은 바로 예배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문제입니다. 오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만난 뒤 예수님이 생전 처음 만난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심을 보고 깜짝 놀라 이렇게 말합니다.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19절)

예수님을 선지자로 인정한 사마리아 여인은 이어서 주님께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뭘 물어본 건가요? 바로 예배의 장소에 대한 질문입니다. “선지자여! 우리 사마리아인 조상들은 이 산, 축복의 산 그리심 산(사진3)에서 예배하라고 가르쳤고, 당신네들 유대인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예배하는 것이 맞습니까?” 예배의 장소가 어디가 맞냐는 겁니다. 우리 사마리아인의 조상을 따라 그리심 산의 제단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당신네들 유대인을 따라 무조건 예루살렘 성전으로 가야 하는지 물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갑자기 엉뚱하게 예배의 장소에 대해 물은 까닭은 사마리아 여인 가슴 속 깊이 자리 잡은 공허와 갈증 때문일 겁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지 않나요? 주일에 교회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마음의 답답함이 해결되지 않아요. 기쁨도 없어요. 마음의 공허와 저 마음속 깊은 영적인 갈증이 해결되지 않아요. 이럴 때 얼마나 답답합니까? 얼마나 속이 탑니까? 사마리아 여인도 아마 조상들을 따라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늘 드렸지만 마음속의 공허와 갈증이 해결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이 여인은 인생의 공허와 갈증을 해결하기 위해 몸부림 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결혼도 다섯 번이나 해보고 지금도 다른 남자와 살면서 인생의 갈증을 해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지금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멸시나 받고 사는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조상들 말을 따라 그리심 산에서 열심히 예배해 보았던 모양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예배를 드리고 제물을 바쳐도 그 마음속 깊은 공허와 갈증이 해결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의심이 생긴 게지요. “과연 우리 조상들 말처럼 이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는 것이 맞나? 혹시 유대인들이 말하는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예배의 감격이 없고 공허함을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가 예배의 장소에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 예배의 장소에 집착할 때가 많습니다. 사실 이번에 코로나 사태를 겪으면서 한참동안, 아니 지금도 이 예배의 장소 문제 때문에 우리는 논쟁하고 고민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집에서, 영상으로 드리는 게 맞는 거냐? 한편에서는 요즘 같은 어려운 때는 가정에서 안전하게 예배하는 게 맞다고 주장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게 무슨 예배냐? 예배는 무조건 교회 와서 드려야지.”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 저 어두운 지하묘지 카타콤(사진4)에서 예배했는데, 그럼 그건 예배가 아니란 말이냐?” 이런 분들도 있고, “지금하고 그때는 상황이 다르다. 우리는 6.25 전쟁 때도 예배를 폐하지 않았고, 박해시대에도 목숨 걸고 예배를 지켰다.”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네.

여러분! 그럼 과연 누가 맞는 겁니까? 어디에서 예배하는 게 맞는 겁니까? 그런데 지금 이렇게 예배의 장소에 대해 집착하고 우리끼리 논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 주님은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예배의 장소문제를 물어본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이 대답하신 내용이 중요합니다. 21절 말씀 읽읍시다.

21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예배의 본질은 장소가 아니라는 겁니다. 여인이 물은 것처럼 그리심 산에서 예배하냐, 예루살렘에서 예배하냐 하는 장소가 본질이 아니라, 예배의 진정한 본질은 바로 예배의 대상이라는 겁니다. 어디서 예배하든 상관없이 예배의 대상이 바르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가 된다는 겁니다. “아니, 그럼 모든 예배가 하나님께 드리는 거지, 하나님한테 예배하지 않는 예배도 있다는 말이냐?” 예, 있습니다. 그런 예배 있습니다.

십계명이 신명기 5장과 출애굽기 20장에 등장하는데 구약의 수없이 많은 율법을 딱 10개로 요약해 놓은 게 십계명이지요? 이 십계명 가운데 두 번째 계명이 이것입니다.

8 너는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밑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신 5:8)

누구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마라? “자기를 위하여!” 그렇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자기를 위해 존재하는 신입니다. 구약성경에서 우상을 만들지 말고 섬기지도 말라는 계명이 수없이 나오는데 그때마다 우상은 “자기를 위하여 만드는 것”이라고 규정합니다. 세상의 모든 우상은 그것이 불상이든, 무슨 신의 형상이든, 큰 나무든, 바위든 모든 우상은 다 자기를 위해 만든 것, 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고, 순전히 나에게 복을 주려고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우상숭배가 우리 기독교 신앙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예배 말입니다. 앞에서 예배는 장소보다 대상이 중요하다고 했지요? 그런데 예배의 대상이 온전히 하나님이 아니라 나 자신일 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인이요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유일하신 분이 아니라, 그래서 예배는 온전히 그 하나님께 집중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이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내 중심으로 예배하고, 내 소원만 아뢰기 위해 예배하고, 순전히 내가 복 받기 위해 예배한다면 그것은 절대 하나님께만 드리는 예배가 아닌 것입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라는 복음성가는 이렇게 찬양하고 있습니다.

주를 위한 이곳에 예배하는 자들 중에

주가 찾는 이 없어 주님께서 슬퍼하시네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그 예배자

내가 그 사람 되길 간절히 주께 예배하네(이 소절만 찬양한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땅에 수많은 예배가 있고, 수많이 많은 사람들이 그 예배에 참석하고 있지만, 그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에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는 그 한 사람의 예배자를 주님은 찾고 계신다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23절 뒷부분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3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이 말씀 꼭 마음에 새기고 우리 모두가 나 중심이 아닌, 오직 하나님께 예배하는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의 예배자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예배자가 되어라!

마지막 세 번째, 예배를 예배 되게 하는 세 번째 조건은 바로 예배자의 자세입니다. 23~24절 말씀 읽읍시다.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배의 대상이 가장 중요하다, 우리가 하나님께만 예배해야 한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24절에 보면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분이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의 자세는 오직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영적 예배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영으로 드리는 예배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생각이나 목적이 아니라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신령한 예배로 하나님을 내 아버지로 고백하고 영이신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려야 한다는 겁니다.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무엇일까요? 진리의 예배란 예수님을 통한 예배라는 뜻입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주님 말씀대로 우리는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아버지를 만날 수도 그 분께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정리해 보면 우리가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뜻합니다. 예배는 ‘누구에게’ 드려야 하나? 성부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배는 ‘누구를 통해’ 드려야 하나? 성자 예수님, 진리이신 주님을 통해 드려야 한다. 예배는 ‘누구의 도우심’으로 드려야 하나?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따라 드려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예배는 매번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역사가 일어나야 한다. 이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 볼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된 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주일마다 수요일마다, 시마다 때마다 그토록 자주 예배했지만 과연 나는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영과 진리의 예배, 살아있는 예배를 드려왔는가? 아니면 습관적이고 형식적인 예배, 하나님도 안 받으시고 내 내면의 갈증과 공허를 조금도 해결 받지 못하는 죽은 예배를 드려왔는가? 생명도 영적 감동도 없는 예배자였는가 하는 것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어디서 예배하든지, 코로나 때문에 어떤 분들은 교회에서, 어떤 분들은 가정에서(사진5) 예배하지만, 예배의 장소가 어디냐는 비본질적인 문제에 매달리지 말고 그 예배의 자리가 어디든 우리는 정말 하나님이 이 시대에 찾으시는 그 한 사람의 예배자로 바로 섰는가만 점검해보면 됩니다. “오늘도 나에게 예배하는 자가 세상에 참 많구나. 하지만 그 가운데 과연 내가 받을만한 참된 예배자가 몇 사람이나 되겠느냐? 나는 그런 예배자 한 사람을 간절히 찾고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코로나 사태가 무조건 나쁜 점만, 절망적인 상황만 있는 게 아니라 우리에게 주는 영적유익이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이렇게 성도님들 일부만 교회에 와서 예배에 참여하고 있지만, 지금 여러분이 예배하는 자리가 어디이든, 교회당이든, 가정이든, 지하실이든, 골방이든, 바로 그 장소를 하나님 만나는 장소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장소를 영과 진리의 예배를 드리며 한 사람의 진정한 예배자로 거듭나는 복된 자리로 만드시는 여러분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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